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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탄생

사람은 아무리 멀더라도 근본을 떠날 수 없습니다. 변치 않는 심정적, 정서적인 근본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뿌리가 거기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넘어설 존재가 없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심(鄕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향이라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육의 재료를 80퍼센트 이상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서 고향과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겠어요?(187-290)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문촌’에서 문선명 총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아버지 문경유 선생과 어머니 김경계 여사의 8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탄생하였습니다. 남평 문씨인 총재의 가문은 “대대로 배고픈 사람은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선의의 공적을 쌓은 집안이었습니다. 증조부이신 문정흘 선생은 당대에 성공하여 부유하였으나, 막내아들인 문윤국 목사가 독립운동에 가산을 헌납하였습니다. 총재의 작은 할아버지인 문육국 목사는3·1운동 편안북도 책임자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로 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가산을 털어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 총재의 일가가 독립만세 사건을 중심삼고 시련을 겪던 터전 위에 하늘의 독생자 문선명 총재가 탄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천품과 지혜를 보였던 문선명 총재는 재림주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늘의 뜻과 섭리역사의 비밀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또한 일본 유학을 통해 원수를 품고 사랑으로 승리하는 노정을 걸었습니다. 문선명 총재가 잉태되기까지 3년 동안에는 생가에 금계가 날아들어 노간주나무 위에서 매일 노래했습니다. 문선명 총재가 잉태된 후 종조부이신 문윤국 선생은 백룡 한 쌍이 바다에서 승천하는 몽시를 보셨고, 문선명 총재의 어머니이신 김경계 여사도 황룡 한 쌍이 비구름과 번개를 뚫고 승천하는 환상을 보셨습니다. 이처럼 꿈과 환상을 통해 장차 태어날 아이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선명 총재의 조부이신 문치국 선생은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돕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어린 시절 타고난 호기심과 탐구력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정의감과 동정심으로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들을 돌보았습니다. 문선명 총재가 10여세 되었을 때 집안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이후 문선명 총재는 독실한 신앙생황을 하게 되었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늘의 소명

선생님은 16세 때에 비상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오랜 시간 눈물어린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님께 나타나셔서 많은 계시와 교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오하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통받고있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134-145)

16세가 되던 해 4월 17일 부활절이 다가오는 어느 날 아침. 문선명 총재는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하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날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류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시켜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문선명 총재는 오직 한 뜻, 하나님과 인류의 해방을 위해 남모르는 공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드디어 구원섭리의 해답을 찾기에 이르렀습니다.


공생애 출발과 수난

2차 대전 직후 기독교문화권을 중심하고 비로소 지상에 부모의 이념을 가지고 통일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기독교문화권이 미국이 통일된 세계위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의 말을 들었으면 해방과 더불어 27세 이후 3년 내에 이 나라의 해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을 통일해서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품었던 사나이의 꿈이 이 기독교와 미국이 책임을 못 함으로 인해 좌절됐습니다.(166-76)

문선명 총재는, 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본격적인 재림주의 노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목사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셨던 종조부 문윤국 선생이 은거하여 정부 수립에 불참함으로 인해 문선명 총재를 위한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재림주의 현현을 예비해 온 남한과 북한의 신령집단마저도 재림주로 온 문선명 총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부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적 기반 위에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어야 할 재림주의 노정은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고, 문선명 총재는 무고한 옥고를 치르며 죽음의 고비를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공산당이 감옥에 넣고 별의별 놀음을 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끝끝내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약속했으면 내가 약속한 것이 절대적이요, 그가 나에게 명령하면 그걸 절대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쉽고 그거 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효자는 효자 노릇 해야 됩니다. 충신은 충신 노릇을 감옥에 들어가서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106-72)

선생님은 옥중에서 매를 맞아 쓰러지면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며 차라리 송구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먼저 아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호소도 원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갈 길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12-205)

문선명 총재는 고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8년 2월 22일 북한 정부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문선명 총재는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평양에서 3개월 수감되었던 문선명 총재는 5월 20일 특별 노무자를 수용하는 흥남감옥으로 이송 되었습니다. 흥남감옥은 수감자들을 굶주림과 추위라는 극한적인 상황에 둔 채로 비료공장에서 3년 동안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총재는 옥중에서도 타인을 생각하며 모범수로 타인의 존경을 받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창설

기독교가 1945년에 선생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 이후로 어떤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반대하는 자리로 떨어지자 선생님은 숱한 고난을 받아야 했고 그것을 스스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통일교회를 창립시켜 기독교를 대신하여 세계적인 탕감복귀의 기반으로 세워야 했습니다.(130-289)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흥남감옥에서 나온 문선명 총재는 부산으로 왔습니다. 부산 범냇골에서 토담집을 짓고 하늘부모님의 슬픔을 위로하며 깊은 기도와 정성 속에서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비밀을 모두 규명했습니다. 문선명 총재의 뜻은 이미 세계를 향해 있었습니다. 대구를 거쳐 서울까지 전국적으로 문선명 총재의 말씀이 전해졌으며, 큰 뜻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1954년 서울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 당시 지식이었던 교수, 대학생들이 문선명 총재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였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학교 측은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교수를 제명하였으며, 문선명 총재를 풍기문란죄로 고발하였습니다. 1954년 7월 4일 무고한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었다가 석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총재의 말씀은 이미 다른 들판의 불길처럼 한국을 넘어 일본, 미국까지 전해졌습니다.

또한 문선명 총재의 말씀을 담은 ’원리해설’ 이 처음으로 발행되는 등 내적 기반과 외적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확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진리의 말씀으로 찾아 세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는 잃어버린 섭리 기반을 복귀하고 국가와 세계를 찾아 세우기 위해 1952년부터 40년에 걸친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중심에 서서

국내에서는 공산주의 방어 문제를 중심한 승공연합 활동을 승공 계몽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든 국민들은 통일교회 움직임에 전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또 기성교회는 통일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반대하는 환경을 넘어 국민이 가야 할 길의 내적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국외에서는 세계 국민들이 하나님의 뜻에 재차 귀속할 수 있는 길을 닦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135-243)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된 후 초창기 활동은 한국 내 전도활동을 통한 내적인 기반 마련에 집중되었습니다. 문선명 총재가 직접 원리 말씀을 강의하고 생활을 통해 식구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등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는 전국적으로 번져갔습니다. 특히 문선명 총재는 눈물로 기도하고 온 몸이 땀에 젖도록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했기 때문에 이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주말 수련회, 7일 수련회, 21일 수련회, 40일 수련회가 정립되었고, 교회의 형태고 갖추어 졌으며, 1957년 초 20개에 불과하던 교회가 1960년 1천개로 확대되는 등 짧은 기간에 한민족의 중심에 교회 기반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세계선교의 확장

단 시일 내에 통일운동은 6대주에 걸쳐 127개 국가에 번지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하나님께서는 선생님에게 게시를 주시어 수백만 명이 새로운 하나님의 게시를 기다리고 있는 미국으로 빨리 가서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가 전 세계의 인류와 연결을 맺는 데 있어서 교량의 역할을 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 었습니다.(102-289)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으로 정해진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향한 문선명 총재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고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문선명 총재의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말씀의 불길은 역사상 전례 없이 짧은 기간 동안 세계 180개국까지 전해졌습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문선명 총재의 말씀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희망은 일시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들로 모아져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다양한 단체를 설립하여 세계평화를 이루어가기 위한 일들을 준비하였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승공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세계평화란 특정 국가의 무력이나 이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래 한 형제임을 깨닫고 참사랑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는 문선명 총재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 중심의 사고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되었습니다.